쌓여있는 CD를 한장씩 한장씩.
by 퍼프
Vanessa Paradis - Vanessa Paradis (1992).
1. Natural High
2. I'm Waiting for the Man
3. Silver and Gold
4. Be My Baby
5. Lonely Rainbows
6. Sunday Mondays
7. Your Love Has Got a Handle on My Mind
8. The Future Song
9. Paradis
10. Just as Long as You Are There

아래의 이야기는 상당부분 나의 뇌내 망상이다.

그녀는 불과 8살에 발굴된 아이돌이었다. 술과 음악을 사랑하는 파리의 택시기사를 노래하는 깜찍한 소녀였다. 그러나 세르쥬 갱스부르를 만난 18살의 그녀는 달라졌다. 날카로운 녹색 눈동자를 휘두르며 숨막히는 관능을 보여주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 속 그녀는 위험한 롤리타 그 자체였다(고 한다, 난 못 봤다). 지미 헨드릭스와 벨벳 언더그라운드를 사랑하고 (사실 내가 보기에 이건 프랑스인 대부분의 공통사항) 영어를 사용하며 불어의 문법을 망가뜨리는 그녀를 사람들은 욕하기 시작했다. 말도 제대로 못하는 쪼끄만 게 겁도 없이 남자나 홀리고 다니는 창녀라고들 했다. 마리안느의 안티 히로인인 셈이었다.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19살의 나이에 그녀는 뉴욕 출신의 바람둥이 흑인과 사랑에 빠졌다. 허리하학적인 감각으로 옛날 음악이나 울궈먹으며 아무 여자나 찌르고 다니는 유부남 놈팽이에게 반해, 급기야는 영어로 앨범을 낸다고 했다. 저 꼴 날 줄 알았다, 잘 어울리는 바퀴벌레들이라며, 술과 마약과 섹스에 찌든 두 년놈의 인생이 어서 끝장나길 학수고대했다.

그는 유태인의 아들이라 흑인 아이들에게 따돌림 당했다. 또한 흑인인지라 유태인 아이들도 그를 따돌렸다. 그러나 가지고 태어난 것이 음악적 재능이라 그는 눈부시게 성장했고 사람들은 (아마도 2007년의 한국인들이 심형래에게 열광하듯이) 그의 개화에 축하를 보냈다. 그런데 안 그래도 바람둥이로 유명했던 그가 멀쩡한 아내를 놔두고 웬 남자 여럿 잡아먹었을 것 같은 프랑스 모델과 만나기 시작했다. 성공하더니 샤넬 No.5의 로망을 따라 프랑스 여자를 꿰어차느냐, 그것도 실제로 새장에 갇힌 새 분장을 하고 샤넬의 광고를 찍었던 여자네, 본국에서도 창녀 취급 받는다며? 등등. 게다가 그가 그녀의 앨범을 제작한다고 하자, 우리의 완소남이 왜 노래도 제대로 못 하는 저런 프랑스 아이돌 따위에게 곡을 줘야 하냐며 분통을 터뜨리는 팬들도 있었다.

그렇게 모두의 수근거림과 저주 속에 두 사람은 만났다. 파파라치와 타블로이드가 지겹게 따라다니는 와중에 만들어진 두 사람의 공동 작업은, 고전 할리우드에 대한 프랑스의 동경과 고전 프랑스 영화에 대한 미국의 동경이 만난 것일 터였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앨범은 일견 그렇다. 기다림의 초조함을 실은 드럼과 심드렁하면서 설레는 보컬의 대조가 돋보이는 I'm Waiting for the Man(지나가는 얘기지만 혹시 온스타일에 게이들이 자주 나와야 하는 이유가 궁금하다면 이 곡을 원곡과 비교해 들어볼 것을 권한다. 빠라디는 Walk on the Wild Side도 커버한 바 있다.)라든지, 전쟁의 상처를 안은 아이들을 위한 송가 Silver and Gold 등, "화려한 슈퍼모델이 청바지를 입고 뉴욕의 거리를 거닐다 레게 모자를 쓴 거리의 악사와 환하게 웃으며 잠깐 노는" 스테레오타입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앨범이다.

그러나 이 앨범, 미묘하다. <오즈의 마법사>를 태연하게 가져온 Lonely Rainbows에서는 탈출을 꿈꾸는 바네사 빠라디의 목소리 뒤로 갑자기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여신의 계시"가 등장할 타이밍과 분위기로 레니 크라비츠가 노래를 한다. 마지막 Just as Long as You Are There만은 "멋진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운 모험"이란 분위기로 흐르지만, 나는 이 앨범이 그저 즐거운 만남에서 가볍게 시작되지 않았다고 상상한다. 아마도, 모종의 은밀하고 불온한 계획이 있었을 것이라 상상한다. "우리를 가쉽거리로 여기며 씹고 버리던 녀석들을 마음껏 비웃어주자."라는.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Be My Baby나 Sunday Mondays도 있지만, 이 앨범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첫 트랙 Natural High다. 중음역대가 찌그러진 일렉피아노는 강렬한 리프를 찌르다 고음역에서 영롱한 솔로를 흘린다. 담담하게 짚어주는 베이스도 무심한 관능 위를 걷고, 단순하고도 무덤덤한 기타도 짜릿하게 귀를 자극한다. 빠라디는 노래 같은 것 배워본 적이 한번도 없는 치기 어린 10대 같은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 모든 것이 역동적인 리듬 속에 동물적으로 꿈틀거리며 더 없이 섹시한 관능을 담고 있다. 빈민가에서 태어난 기적적으로 매력적인 사생아랄까.

빈민가에서 우연히 발굴된 놀라운 아름다움의 소유자 이야기는 언제나 (욕망을 일으키는 행간의 상상까지 곁들여져) 대중을 매혹시키는 커버스토리지만, 실제로는 말 그대로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어나듯 드문 일이다. 생활의 풍요 뿐만 아니라 건강, 품위, 우아함, 육체의 아름다움까지도 자본을 가진 자에게만 허용되는 세상에서 아직도 나나가 태어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축복보다는 저주와 관음을 더 많이 받고 태어난 이 앨범의 첫 트랙이 이토록 섹시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그런 이유로, 더욱 놀랍고 소중하게 느껴진다.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았는데, 레니 크라비츠의 레니는 그의 삼촌에게서 따온 이름으로, 삼촌인 레니 크라비츠는 1951년 20살의 나이로 대한민국 양평에서 전사했다고 한다. 어무나 깜짝이야.
by 퍼프 | 2007/08/15 11:41 | Album | 트랙백 | 덧글(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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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뻔뻔한소심쟁이상쓰 at 2007/12/09 18:41
미친듯이 들었던 앨범인데... 빠라디에게 허우적 거리기보다는...
레니횽에게 더욱 반하게 만든...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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